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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공방 미르의 가구이야기
전통가구

소반에 관하여

by 백주현[미르] 2007. 5. 26.
소반

우리 전통 식생활 문화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주방기구 중의 하나가 소반이다. 소반은 다리와 판으로 이루어지는데, 다리가 하나 또는 셋으로 된 것도 있으나 대부분 4개이고, 다리 위의 판에는 선을 둘렀으며, 여러 가지 조각으로 기교를 보인다. 모양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직사각형의 '책상반(床盤:統營盤)'이 가장 많이 쓰인다. 소반은 생김새, 만든 고장의 이름, 만든 나무 등에 따라 여러 가지 명칭이 붙는다. 모양을 보고 붙인 명칭을 보면, 직사각형으로 생긴 소반은 책상 같다 하여 '책상반'이라 하고, 판이 둥근 것은 '원반(圓盤)'이라 하며, 판이 반달 모양인 것은 '반달상[半月床]'이라 하고, 판 가운데가 뚫려 전골틀을 올려 놓을 수 있는 상은 '전골상(煎骨床)'이라 하며, 직사각형으로 많은 음식을 올려 놓을 수 있는 큰 상은 '교자상(交子床)'이라 한다. 또 판의 모양이 12모이면 '열두모판', 8모이면 '팔모판', 6모이면 '여섯모판'이라 하고 판의 모양을 연잎[蓮葉]모양으로 조각한 것은 '연잎판'이라 한다. 소반은 식기를 받치거나 음식을 먹는데 사용한는 작은 상으로, 다른 가구와는 달리 계층을 막론하고 사용한 생활필수품이다. 우리는 음식을 땅바닥에 놓고 먹는 것을 부끄러움으로 여겼다. 심지어 거지에게조차 맨바닥에 음식을 주는 일을 피했다. 그런즉, 어른 아이 할것 없이 소반에 받쳐 음식을 들기 마련이었고 거기에 따르는 범절도 까다로웠다. 이를테면 소반 모서리에 앉아서는 안 된다. 수저를 쓸 때에는 소리가 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소반에 칼을 얹어서는 안된다.처마끝 밑에 상을 올려서는 못쓴다 하는 금기들이다. 피난살이를 할 때도 대를 이어 물려받은 손때 묻은 소반만은 봇짐 위에 얹어 갈 만큼 소중히 여겼다. 여러모로 그 쓰임새가 긴했던 소반은 우리 살림살이에서 가장 성스러운 생활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아기를 잉태하기 전부터 정화수를 떠놓고 첫새벽이면 옥동자를 점지해주기를 빌었던 상을 시작으로, 돌이 되면 돌상, 젖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겸상(조부모나 부모들과 같이 밥을 먹는 상), 외상(따로 혼자 먹는 상), 주안상(손님을 접대하는 상)등 무수하게 상을 만나게 된다. 그뿐 아니다. 동상례(관례를 치르고 새신랑으로서 처가 권속에게 처음으로 하는 예)에도 상이, 죽은 후에도 피어오르는 향연 너머로 슬피우는 자손들을 대하게 되는 자리에도 향상이 있었다. 이처럼 소반은 음식이나 물건을 받쳐드는 경외사상을 담고 있다. 흔히 우리 목가구의 가장 큰 특징은 자연적인 아름다움이라고 말한다. 목재의 아름다운 무늬결을 그대로 살린 상판이나 동물의 다리를 흉내낸 상다리의 재미스러움, 번잡한 장식 없이 간결한 선과 면으로 이루어낸 단순하면소도 소박한 규모를 가진 소반에서 우리는 이러한 자연미를 흠씬 느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식생활에 직접 사용된 공예품으로서의 실용적인 미 또한 돋보인다. 매끄럽게 다듬어지지 않고 자귀나 낫 등의 자국이 그대로 보이는, 칠조차 안된 민간의 투박한 막소반을 오히려 정감이 간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이동거리가 짧은 상과 식탁, 제탁 등의 탁, 운반 기능이 중시된 반등을 뚜렷이 구분하지 않고 대개 소반이라고 통칭한다. 그것은 소반이 부엌에서 사랑채나 안채로 식기를 받치고 옮기는 쟁반의 기능과 함께 방안에서는 그대로 상의 기능을 겸하는 이중의 기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반의 크기는 찻상이나 소상 등의 작은 상과 여럿이 둘러 앉아 먹는 두레반의 경우처럼 넓은 것도 있으나 보통 성인의 어깨 너비를 넘지 않으며 양 팔에 부담을 주지 않도록 했다. 소반은 천판을 먼저 깎고 다리를 마련한 다음에 변죽, 중대, 족대를 같이 다듬는다. 재료로 쓰이는 목재는 여성들이 음식상을 차리고 운반해야 하므로 한 사람의 힘으로도 식기를 얹어 운반하기 좋을 만한 크기에 들기 편하도록 가벼운 재질이 요구되었다. 나무는 괴목,은행나무,소나무,느티나무,단풍나무,대추나무,피나무 등을 사용했다. 특히 은행나무는 탄력이 있어 흠이 잘 생기지 않고 잘 썩지도 않으며 가벼워서 널리 이용되었다. 나무결이 아름다운 느티나무와 재목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소나무도 많이 쓰인 소반의 재료였다. 소반의 반면이 트거나 흠이 생기는 것을 마고 방수와ㅏ 미적 효과를 위해서 칠을 하였다. 지체와 형편에 따라 왕실에서는 황칠, 주칠, 흑칠을 하여 화사스럽게 치장했고, 끼니를 잇기 어려운 서민들은 들기름, 호두기름, 잣기름이나 감물을 곱게 먹여 아침저녁 행주질과 손때로 제물에 길이 나게 하였다. 상이나 반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야 나타나지만,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사족반과 원형 삼족반을 볼 수 있다. 무용총 주실 벽화에서는 다리 없는 쟁반과 말굽 모양의 다리를 가진 둥근 소반을 볼수 있다. 신라시대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 중에서도 타원형 소반 그릇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소반은 꽤 오랜 역사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소반은 점점 쓰임새가 많아지고 모양도 다양해지는데 조선시대 후기에 더욱 발전하였다. 소반은 대가일수록 큰일을 치를 일이 많았으므로 상당한 숫자를 보유하고 있어야 했다. 이렇게 우리나라에서 소반이 크게 발달한 이유는 입식생활을 하는 서양과는 달리 조리된 음식을 소반 위에 올려서 방으로 옮겨와 식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소반은 음식을 나르는 쟁반과 식탁의 구실을 겸한 독특한 구조로 발전되어왔다. <후한서>부여조에 의하면, "음식을 먹을 때 조두를 쓴다"고 했는데 조는 소반이나 도마를 가리키므로 소반은 음식상뿐만 아니라 음식물을 조리하는 도마로도 사용되었으며 신이나 상전에게 음식물을 진상할 때 진열대로도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소반은 산지, 형태, 용도, 재질에 따라 수십 종으로 나위어지며 각기 명칭이 붙는다. 특히 만들어진 산지에 따라 그 지방색이 뚜렷한데 그 중에서도 경상도 통영반, 전라도 나주반, 황해도 해주반이 유명하다. 이들은 지방색이 두드러진, 독특한 특징이 있어 재미있다. 경남 통영에서 생산되는 통영반은 조선 중기부터 이름난 소반이다. 천판을 제 몸에서 파서 전으로 삼은 통영반은 나주반에 비하여 제작이 용이하고 실용적이어서 민가에서 널리 통용되어 최근까지도 밥상의 정형이 되었다. 꾸밈새는 중대가 네 다리 사이에 두 가닥으로 둘러져 있고, 위 중대와 천판 사이에는 변자를 다리에 끼웠으며, 다리는 천판에 굽 안을 파서 끼웠다. 다리 중간쯤에 또 한 개의 중대를 둘러 다리를 고정시켰는데 이러한 이중의 중대가 통영반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나전칠기가 유명해지면서부터는 상판과 운각, 다리 등에 자개로 십장생, 천도, 운학, 복자 등의 무늬를 놓아 자개반으로도 유명해졌다. 겉보기가 통영반과 엇비슷한 나주반은 천판에 따로 전을 붙인다. 변자를 천판에 홈을 파서 끼웠고 네 다리를 머리 쪽에서 변자에 끼워서 머리 안 부분이 천판 굽 안에 끼워 넣음으로써 판이 틀어지는 것을 방진한다. 이 때문에 나주반은 다른 지역의 소반보다 변죽(상 가장자리)의 두께가 두껍다. 대개의 경우 중대가 없거나 다리 위쪽으로 한 가닥을 두르고 있는데, 다리는 아무런 장식 없이 둥글게 깎아 곧게 뽑어 내렸다. 나주반은 화려하고 잡다한 꾸밈새보다는 견고하고 튼튼한 짜임과 나뭇결이 그대로 비쳐 보이는, 투명하고 붉은 생칠에서 우러나오는 부드러운 우아함이 특징이다. 4각반,12각반, 호족반, 다각반 등이 전해오는데 일반적으로 나주반이라 함은 보편화된 반상인4각반이다. 해주반은 통영반이나 나주반과는 꾸밈새가 한결 다르다. 철판은 통영반과 같으나 좌우로 판자를 써서 다리로 삼았으며, 천판 밑의 앞뒤에는 운각을 받쳐서 짜임새를 갖추게 했고 중대가 없다. 대개 은행나무나 가래나무에 옻칠을 하여 윤기를 낸 해주반은 장식성이 강하여 화려한 귀족적인 멋을 풍긴다. 이밖에 지역의 소반으로는 강원도반을 들 수 있는데, 형식은 해주반과 같이 상판의 좌우 양끝에 판각을 대어 다리를 만든다. 판각에는 해부반에서 보이는 화려한 문양보다는 □ ♡ ○ 등의 문양으로 투조하여 장식한다. 흔히 개다리소반이라 불리는 구족반은 충주에서 주로 만들어져 충주반이라 불리는데 해주반과 같이 판각으로 구성되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만(卍)'자나 꽃 등의 투각이 없이 능형의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또 판각과 족대 사이에 풍혈이 없어 아주 얇은 족대가 붙어 있을 뿐이다. 호족의 변형으로 다리가 유난히 가늘고 길어 일명 학족반이라 불리는 예천반이 있으며, 역시 호족반의 변형이나 다리의 상부가 둥글고 반전하는 부분이 없이 아래까지 곧게 내려간 정선지방의 상과 호족의 어깨가 각진 것이 힘차고 밑으로 곧게 뻗어 내려오다 밖으로 반전하는 안성반 등을 들 수 있겠다. 생김새에 따라 명칭이 붙여진 소반은 반면과 다리의 모양에 따라 다시 나누어진다. 형태에 따른 것으로는 책상반(사각반이라도 하며 가장 흔한 유형이다),원반(비교적 상판이 넓고 다리는 낮은 둥근 판각으로 된 반), 반달상, 전골상, 다각반(상판의 각의 숫자에 따라 불려진 명칭인데 12각을 보통으로 하고 8각반도 있다),연잎반 등과 이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특이한 모양을 한 별반이 있다. 원반은 크게 궁중에서 쓰이던 원반과 일반 서민들이 쓰던 막소반으로 대별 되는데, 귀중에서 쓰이던 원반은 경사스러운 일이 있어 연회를 베풀때 임금이 신하에게 음식 하사용으로 사용하고 음식을 먹은 후 반은 집으로 가져가도록 했다고 한다. 별반은 모두 한껏 멋을 낸 상류층의 특수 소반으로 식기나 음식을 받치는 본래 기능보다는 장식을 목적으로 한 것이 많다.


다리는 말, 개, 호랑이와 같은 짐승들의 다리를 흉내 내어 달았으나 단순히 흉내만 낸 것이 아니라 용을 새긴 상을 용상이라 이름 하듯이 무관은 호랑이를, 문관은 말을, 개는 말 그대로 '개털'이라 자조하던 서민을 뜻했다. 다리의 모양에 따른 명칭은 개다리소반, 호족반, 죽절반, 외다리소반 등으로 불린다. 개다리소반은 소반의 다리가 개의 다리와 같다 해서 이름 붙여졌는데 구족반이라 부른다. 각을 넣은 다리가 밖으로 둥글게 벌어지면서 발끝이 안으로 굽어져 바닥을 힘있게 딛고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다리에는 아무런 장식선이 없고 굵은 것이 호족반에 비하여 남성적인 느낌으로 우리 공예품의 소박미가 물씬 풍겨 나오는 상이다. 호랑이의 긴 다리 형태를 한 호족반은 상판을 받치고 있는 다리의 어깨가 힘 있게 바깥쪽으로 불거지면서 다시 안으로 구부러져 유연한 S자형을 이루다가 발끝이 살짝 내밀린 모습을 하고 있다. 전라도 남부 지방을 제외한 전역에서 즐겨 사용되므로 굳이 지방별로 구분되지 않는다. 호족반은 원래 양반층의 전유물이었으나 조선사회의 신분질서가 무너지면서 민가에까지 쓰이기도 했다. 다리가 운각을 물고 반에 접해 있는 것이 보통으로 만곡이 심하고 위용이 있어 대궐용 수랏상이나 궁중제례 등에 많이 쓰였다. 민가에 쓰이던 호족반은 다리의 굴곡이 보다 완만했고, 시대가 내려오는 것일수록 완만하고 힘이 빠질 듯이 가늘고 빈약해지는 것이 특징이다. 이 호족반이 유난히 가늘고 길게 변형된 형태로 학족반 이라고도 불리는 것이 예천반이다. 또 소형의 다반 등은 다리에 족대가 없는 것도 있다. 마족반은 다리가 마족의 형태로 된 소반으로 조선 후기에서 일제 때에 널리 쓰인 소반이다. 현재 가정에서 쓰이는 밥상에서도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다리의 형태이다. 대개 통영반의 형식에 이 마족을 한다. 일주반은 한 개의 다리로 반의 중심을 바치고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일명 단각반이라고도 불린다. 반면의 크기가 작아서 간단한 주안상이나 다반으로 쓰였다. 죽절반은 대나무의 마디 모양으로 소반의 다리를 장식한 소반이다. 지조가 굳은 대나무의 상징을 상다리에 옮겨 곧고 튼튼한 느낌과 고아한 인상을 나타나게 한다. 장방형이나 원형 어느 다리에도 잘 어울리고 특히 호족과 절충하여 궁중의 의례용으로 사용하였던 만큼 매우 화려한 반의 다리장식으로 이용되었다. 쓰임새에 따라선 밥을 먹는 식반, 주안반, 음식을 나르는 번상(일명 공고상),약반(주안상과 비슷한 작은 소반으로 약그릇을 놓거나 나르는데 사용하였다), 다상, 돌상, 혼례식의 합환주반과 기러기상, 제례에 쓰이는 제상, 잔치를 치르기 위한 큰 상으로 개화기 이후에 제작된 교자상 등으로 나누어진다. 그 밖에 다리의 높낮이에 따라 지칭된 독좌상, 고각반, 엄족반이 있다. 공고상은 원래 관청이나 대궐에서 숙식하는 관리들을 위해 음식을 머리에 이고 나르기 위하여 만든 기능적인 상으로 사판의 각의 수와 같은 판각이 바로 붙은 구조로서 나를 때 앞을 내다볼 수 있고 또 손잡이의 구실도 할 수 있도록 개구와 투창이 뚫려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수저와 젓가락을 넣은 서랍이 달리기도 하였다. 안상형, 방형, 원형 등의 투창은 卍字문, 칠보문 등의 투조로 장식된다. 이 공고상이 변형되어 판각의 높이가 높아지고 앞을 보기 위한 개구는 단순히 장식화 하여 일반 민가에서는 풍혈창이라는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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