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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공방 미르의 가구이야기
미르의 가구이야기/책과 도면 그리고 테크닉

스칸디나비아

by 백주현[미르] 2007. 7. 6.
1. 주변환경

스칸디나비아에 인류가 살기 시작한 것은 약 1만년 전부터라고 하나,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9∼11세기에 걸친 노르만 인의 해외진출(바이킹의 활동) 때부터였다. 그들은 가혹한 자연환경과 싸워가면서 서유럽과 러시아에 진출하여 교역과 약탈로 부를 축적하고, 이 무렵에 전해지기 시작한 그리스도교라는 새로운 사상을 수용하여 통일국가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 북구의 주역 : 스웨덴
    북구의 주역으로 스웨덴이 역사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바이킹의 활동이 시작된 9세기 부터이다. 한때 러시아를 거쳐 흑해 방면, 카스피해 주변, 비잔틴까지 진출했던 바이킹의 활동은 약 200년만에 종말을 고하고, 스웨덴은 그리스도교의 전래를 발판으로 통일왕국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2세기에는 스웨덴의 십자군이 핀란드를 교화시켜 핀란드를 속령으로 영유하게 되었다.

    이 무렵부터 스웨덴의 역사는 유럽 전체의 역사와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1397년에 스웨덴은 덴마크가 주도하는 칼마르 연합에 가담함으로써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주도권 싸움에서 덴마크에게 패배했다. 그러나 16세기에 이르러 구스타프 바사가 즉위하자 연합을 해체시켜 독립을 이루고, 그 손자 구스타프 2세(아돌프)는 유럽에 대한 군사개입을 계속하여 덴마크·독일 등으로부터 방대한 영토를 획득했다. 그 결과 스웨덴은 북유럽의 강국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그러나 1708년, 북방전쟁에 개입하여 러시아에 패배함으로써 발트해 연안의 영토를 잃고 대국시대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또 1809년에는 핀란드마저 러시아에 넘겨주게 되었다. 그리고 1814년의 나폴레옹 전쟁에 가담하여 노르웨이를 획득했으나, 이 역시 1905년에 독립을 인정했다.

    스웨덴은 20세기에 들어와 무장중립정책을 택해, 제1·2차 세계대전 때도 중립을 고수했다. 현재 스웨덴은 유엔에 가입하고는 있으나, NATO에는 가맹하지 않고 중립주의를 고수하고 있으며, 스칸디나비아 제국과는 북유럽 이사회를 통해 경제·사회·문화 면에서 협력하고 있다.

  • 고립성이 강한 지역적 특성
    스칸디나비아 지역은 북해와 발트 해를 끼고 있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유틀란트 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다. 이 곳은 북위 55°이북의 북부 유럽으로, 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와 덴마크 및 아이슬란드로 구성된다.

    이 지역은 유럽의 최북단에 위치하여, 유럽의 핵심 지역으로부터 떨어져 고립성이 강한 지역으로, 정치적 중립을 견지함으로써 비교적 안정과 평화를 누려왔다.

    이 지역은 고위도 지방이기는 하지만 따뜻한 북대서양 해류와 편서풍의 영향을 받아 겨울철에 비교적 따뜻한 해양성 기후가 나타난다. 한편, 스칸디나비아 산맥을 중심으로 동서 간의 기후 차이가 심하다. 그리하여 서해안과 남부는 겨울에도 바다가 얼지 않으나, 스웨덴의 중부와 핀란드는 겨울 추위가 심하여 보트니아 만이 결빙한다.

    북부지역은 타이가 기후와 툰드라 기후가 나타난다. 이러한 기후로 인하여, 남부 지방과 해안에는 혼합림, 내륙 지방에는 침엽수림이 분포하여 세계적인 임업 지역을 이루고 있다. 북극해 주변에는 툰드라 식생이 나타난다.

  • 북부유럽 국가들은 상호유사한 시스템과 문화를 공유
    북부유럽의 주민은 원래 게르만 족에서 갈려나온 노르만 인이다. 근세까지만해도 북방의 바이킹 족이라 하여 야만인으로 불리워졌다. 이들이 수렵과 유목 생활을 하다가 정착하게 된 것은 기원전 1세기 경이다. 그들은 노르웨이 인, 스웨덴 인으로 분화되어 각기 문화적 특색을 지니고 있으나, 언어는 서로가 의사소통을 할 정도로 유사하다. 이에 대하여, 핀란드의 언어만이 우랄·알타이 어족에 속하고 있어 언어 계통이 다르나 언어 소통이 가능하다. 북부 유럽 국가들은 생활 양식과 전통·종교·정부 형태 등이 유사하여 문화적 유대 관계가 깊다.

  • 적은 인구밀도와 자연친화
    스칸디나비아 지역은 자연 환경조건이 일상생활에 불리하여 인구수가 적고 인구 밀도도 매우 낮다. 전체 유럽 면적의 1/4 이상을 차지하면서도 인구는 약 3000만명 내외에 불과하다.

    스칸디나비아 산지와 북극권에는 인구 밀도가 1㎢당 1인 미만이며, 주로 반도의 남부와 보트니아 만 연안에 인구가 집중되어 있다. 남부 지방의 인구 밀도가 높은 것은 대부분의 도시들이 이 지역에 입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덴마크는 이 지역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국가이며, 나머지 나라들은 20명/㎢ 미만에 불과하다.

  • 복지국가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국가들은 불리한 자연 환경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진취적이고 근면한 생활 태도로 환경을 이용 개발하여 왔다. 그리고 근대 이후, 중립주의를 내세워 오랫동안 평화를 누려오면서 안정적인 정치·경제·사회 발전을 이룩하여 세계 최고 수준의 선진 복지 사회가 되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점차 풍요속의 사회 문제가 등장하고 있다. 즉, 과도한 산림 벌채 등에 의한 자원 고갈 문제가 대두되었는가 하면, 서부 유럽 공업 지역에서부터 유래된 산성비(酸性雨) 등의 공해가 삼림 자원에 큰 피해를 주고 있다. 또, 고도의 사회 보장 제도를 비롯한 복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많은 세금과 비용을 충당해야 되는 문제가 있다.



    2. 전통과 현대화의 과정

  • 수공예적 전통과 자연에 바탕한 향토주의
    스칸디나비아는 산업혁명의 영향을 받아 현대 공업화했으며, 수공예적 전통은 점차적으 로 대체되어갔고 다른 유럽 제국과 마찬가지로 가능한한 후세에 그들의 수공예적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시킨다는 목적으로 일관해 왔다.

    그러나 스칸디나비아의 모던디자인은 실질적으로 1907년 독일공작연맹의 영향으로 보다 사회적으로 새로운 추진력을 갖게 되었고 1920년대까지는 그들의 디자인의 사회화는 최상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다. 모던디자인의 모두가 그렇듯이 이들도 기능주의적 이념을 기조로 하면서 북구의 독특한 향토주의적 기능주의로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다.

    물론 디자인과 회사(제조업)가 실질적인 수준에서 조직적인 활동을 하기는 스칸디나비아도 오래되었지만, 그것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활동에 지나지 않았고, (예를 들어 은 1845년에 설립되어 현대에까지 존속하고 있다) 1914년 스웨덴의 동(同) 기구가 보다 산업에 접근 협력하기 위해서
    <스웨덴 디자인협회. Svenska Sjldforeningen : Society for Industrial Design>로 근대화하면서 북구의 디자인은 독특한 성격으로 형성되어 갔던 것이다.

  • 전통과 자연주의에 바탕한 스칸디나비안 기능주의
    1935년부터 55년 사이의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에 관한 이야기는 같은 시기에 신대륙 미국에서 벌어진 사건들과는 엄청나게 다르다. 이러한 사정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서의 상대적으로 보잘것없는 산업규모, 전통에의 지속적인 의존, 응용미술에의 집착에 주로 기인한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맥락에서는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은 세기의 전환기에 독립된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모두 디자인을 그들의 정치적·경제적 독립을 확보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인이라 생각했다. 1900년경 그들은 모두 제나름의 아르누보 스타일의 국가적 변종들을 발전시켰고, 이 세 국가들에서 얼마동안 가구, 도자기, 유리, 금속제품, 직물, 전통공예같은 영역에 이를 적용했다. 19세기 중엽에 길드 시스템을 철폐하면서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는 그들의 공예전통을 보존할 수 있는 단체와 교육시설을 설립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세기가 바뀌면서 그들은 모두 그들이 `산업미술(industrial art)'이라 지칭하는 것을 추구하면서 공예적 프로세스를 산업적 생산에 통합시켜야 한다는 필요성을 인식했다.

    이들은 기능주의 원리를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그들의 전통과 생활, 자연주의에 바탕한 합리성에 융합시켜 조화시킴으로써 스칸디나비아 기능주의라는 특성을 이루었는데 1939년 뉴욕의 세계박람회에서는 경직성에서 탈피한 유연한 곡선, 온건한 표현 등 단순 간결한 현대적 양식으로 `Swedish-modern'이란 찬사를 받았다. 이 전람회는 `디자인의 건전화를 향한 운동'을 슬로건으로 하여 일용품의 높은 품질수준, 현대기술로 생산된 소비제품, 기능적 형태, 적합한 재료사용, 디자이너와 기업의 협동으로 생산된 미적인 제품을 보여줌으로서 이러한 스웨덴 디자인 논리는 당시 세계 디자인 의식을 크게 고무시켰다.

  • 인간미 넘치는 디자인
    1950년에 스칸디나비아식 모던디자인은 시대를 대표하는 대표적 디자인 언어로 통용되어, 자연재료, 수공예직물, 유리공예, 도자제품 등에서 보이는 인간미 넘치는 디자인으로 세계적인 각광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북구제국(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의 대명사로 `스칸디나비언 그레이스'는 독특한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1954∼1957년에는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의 미국 순회전 개최하였으며, 산업미술, 주택환경 디자인에 대한 관심고조로 영국에 영향을 주었으며, 이는 기능주의와 휴머니즘이 공존하여 디자인 문제에 있어서 명확하고 실질적으로 접근한 것이었다.

  • 예술적이고 실용적인 제품
    1960년에는, 고도의 공업화된 나라에서 나타나는 공예와 산업사이의 분열증상으로부터 심한 갈등을 겪지않은 스칸디나비아의 각 나라에는, 전통적 공예가 파괴되지 않고 비교적 폭넓은 산업생산분야 가운데 융합될 수 있어서 예술적이고 실용적인 제품을 발전시켰는데, 특히 도자기, 금속공예, 유리공예, 가구, 직물분야의 스튜디오 작품은 훌륭한 생활제품으로써 일반인들의 일상생활에 잘 활용될 수 있었다.

  • 스칸디나비아 디자인 발전에 기여한 예술가들 가운데서 디자이너로 전향한 화가와 조각가들이 초기의 디자인 세대라고 말한다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는 특히 건축가들이 디자인 발전에 크게 참가하여 공업시대의 디자인 전통을 수립하는데 공헌하였다. 1960년대부터는 새로운 교육에 의한 새로운 디자이너 세대가 그들의 전통과 융화하면서 공업시대의 생활용품, 자동차, 전기다리미, 세탁기, 전기용품, 기계 기기류와 같은 공업디자인도 크게 발전하였던 것이다. 물론 공업디자인과 같은 분야에서는 오늘날 우리의 일상생활과 관련되는 전 영역에 걸친 기계제품을 디자인 한다는 것은 동시대의 다른 나라의 동일 제품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니지만, 간결 명쾌하고 우아하며 청명함의 맛을 가진 스칸디나비아의 디자인은 현대 디자인 감각의 한 전형으로 인정되고 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의 공업디자인이 그 한 예이다).

  • 사회적이고 공공적인 이익을 중시하는 디자인
    1970년 이후에는 인간의 삶의 질과 인간환경에 (세계적인 복지국가들이기에) 깊은 관심을 갖고 이에 따라 모든 인간을 위한 디자인으로서 지체부자유자를 대상으로 하는 제품, 의료기구와 같은 전문기기, 인간공학적이고 대상의 본질을 추구하는 디자인에서, 최근에는 환경 친화적인 생태학적 디자인(Eco-design)에 그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유럽 및 미국의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이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동기유발되는 산업에 관련되어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디자인에 한정되어 있는 것에 환멸을 느껴 사회적으로 공공의 이익을 위한 분야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 자연적인 소재와 꾸밈없는 디자인

  •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국가들은 항상 풍부한 목재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그들은 기발한 목재 사용방법으로 세계 정상의 자리를 차지했다. 50년대나 60년대에는 스칸디나비아 스타일에 있어서도 이러한 현상은 계속되었다. 단순하고 거칠은 목질이 드러나도록 만든 간단한 목재의 처리법과 각이 많이 지지 않은 가구와 조명기구들, 벽걸이 카펫, 장식용 직물 등에 나타나는 우연적이면서도 분명하게 대조되는 기하학적인 북유럽의 직조에 의한 모든 실내장식물들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간단한 구조와 각이 밋밋한 가구의 형태는 분해와 포장이 용이하도록 해주기 때문에 최초의 판재로 된 조립가구가 70년대 중반 스칸디나비아에서 나왔다. 이러한 조립가구는 구매자로 하여금 상품의 배달을 기다리는 것으로부터 해방시켜주었으며, 가정을 위한 가구의 구입과정을 더욱 자발적으로 만들어주었다.

    유리나 도자기 분야에 있어서도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국가들은 색상의 대담한 사용, 원료의 투박함, 피요르트 풍경의 자연형태를 반영하는 단순한 곡선 등으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예를 들어 핀란드인 티모 사르파네바(T.Sarpaneva)의 <수오미. Suomi> 식기 세트는 1976년 독일의 <로젠탈>에 위탁되어 수수료를 받은 것으로, 그 형태는 단순하고 깨끗하다. 그의 오벨리스크 형태의 <꿈으로의 통로. Gateway to Dreams>라는 1981년의 유리조각은 수정체 구조를 연상시킨다. 1976년 알바 알토(A.Aalto)가 사망한 이후에도 그의 <아르텍. Artek> 가구회사에서는 곡선미의 목재면판, 얇은 판자모양의 부품 등 그의 전통을 계속해서 이어받고 있는데, 이들중 어떤 것들은 20년대에 디자인된 것들이다.

    핀란드인 부부 앤티 누르메스니미(A.Nurmesniemi)와 뷰오코 에스콜린 누르메스니미(V.E.Nurmesniemi)는 절묘하도록 섬세한 작품을 만들어왔는데, 앤티는 단순하고 가벼운 곡선의 가구를 디자인하고 뷰오코는 그 가구들을 씌울 직물들을 디자인하며 또 의상을 위한 직물을 디자인한다.




    1936년 덴마크의 게오르그 옌센(G.Jensen)이 물려받은 그의 가족회사는 장식이 없고 우아한 식기로 정평이 나있었다. 그때에 많은 가정에 식기세척기가 보급됨에 따라 전통적인 재료들이 더이상 쓸모없게 되었다. 은, 은도금품, 골재 식탁용품 등은 열과 세제의 사용을 견딜 수 없다. 가정생활 형태의 변화로 일을 하는 부모들은 번거로운 음식을 준비할 시간이 없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독신생활을 하며 작은 부엌을 사용하므로 식탁용품과 다른 부엌용품들은 일반의 용도에 더욱 적합하게 되어야 했다. <옌센. Jensen>은 스테인레스 스틸을 사용해 새세대의 식기를 위하여 아름다운 조각형태를 창조함으로써 이러한 요구에 부응했다. 골재와 상아로 된 손잡이는 플라스틱으로 대체되었고, 이 플라스틱 제품은 거리낌없이 밝은 색상을 사용할 수 있어 형식적인 느낌을 덜 줄 수 있었다.

  • 새로운 시대 디자인의 거장은 스웨덴의 <에르고노미 디자인 그룹>으로, 이 그룹은 인체에 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한 에르고노미 스타일 부엌용품의 기발한 개발로 유명하다. 그룹의 일부는 국가의 재정지원을 받고 있으며, 순수한 연구활동만을 한다. 그룹의 일원인 마리아 벤크톤(M.Benkton)과 스벤-엔릭 유린(S-E.Juhlin) 두 사람은 신체장애자들을 위한 시설물과 건축가구를 생산하는 데 있어 선봉적인 연구로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의 접근방식은 지체부자유자들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힘과 운동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적당한 물건을 제공하여 지체부자유자들의 품위를 회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여왔다.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이란 말이 제2차 세계대전후부터 처음 나타났을때 이것은 하나의 대명사처럼 독특한 성격으로 대변되었으며, 스칸디나비아 제국은 항상 국제적으로도 하나의 이미지로 나타내기 때문에 그들의 디자인은 하나의 특질이며 각각의 특수성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들은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하나로 결속되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덴마크의 은제품, 가구, 핀란드의 융단, 섬유디자인, 노르웨이의 에나멜링, 스웨덴의 유리, 도자기 등으로 대표되기는 하지만 이들 각국의 디자인의 특질을 구별한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며 구태어 구별할 필요도 없다.

  • 가정생활을 중심으로 해결하려는 기본철학
    스칸디나비아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유행의 중심으로 자처하던 중앙유럽의 제국처럼 고상하고 영광스러운 배경을 결코 형성하지는 못했다. 모든 원자료가 풍부하지도 않았으며, 악조건의 기후에도 불구하고 `가정'이라는 것을 중심으로 그들 특유의 디자인 특성을 발전시켜 왔던 것이다.

    스웨덴의 `보다 아름다운 제품을 생활에'이라는 슬로건은 바로 북구 스칸디나비안 디자인의 기본철학이며, 향토주의적 기능주의의 슬로건이 바로 디자인의 문제를 우선 `가정생활'을 중심으로 해결하려 하였던데 그들의 철학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해서 가정과 세간설비는 특별한 관심으로 개량되었으며 석기시대 이래의 덴마크 도자기에 대한 전통, 중세부터 발전된 핀란드의 융단, 바이킹 시대부터의 노르웨이의 목각세공, 스웨덴의 수공예전통과 자연재를 다루는 국민적인 기술과 전통이 19세기말과 그 이후까지도 전승되어 오고 있는데 이들 디자인의 특성이 있다. 스칸디나비아에 있어서 산업혁명이 다른 유럽보다 늦게 일어났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다행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사회와 협조해서 수공예의 전통이 기본적으로 공예제품속에 살아남고 현대적인 생활양식으로 전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칸디나비아 제국의 어느 곳을 가보아도 현대산업에 대한 불협화음이 없고, 고풍의 분위기 가운데 그들의 전통적인 감각을 생활 구석구석에까지 실질적으로 채용하고 있는 현대를 실감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의 이러한 성취가 있기까지는 그들 선구자의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하여, 선구자들의 노력에 의해서 영국의 미술공예운동의 이념이 비교적 빠르게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성공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산업혁명이 크게 영향을 주지 못했으며 전통이 기복없이 전승될 수 있었고, 나아가 가장 중요한 스칸디나비아인의, 근본적으로 휴머니스틱한 기질이 융합함으로써 그들의 전통―수공예를 기조로 하는 현대 디자인의 특성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발전은 아주 뚜렷한 것으로서 개인 디자이너에 있어서의 발전이 아니라 디자이너와 회사(기업)가 실질적으로 협력한 한 좋은 표본이며 북구의 각국이 서로 생동적으로 교류함으로써 이루어 놓은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의 특질인 것이다.

    북구의 디자인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 세나라―스웨덴, 덴마크 그리고 핀란드―의 주변환경과 디자인의 현대화의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가난한 농업국에 지나지 않던 스웨덴은, 많은 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여 오늘날에는 세계에서도 가장 앞선 선진국의 하나가 되었다. 풍부한 수자원은 값싼 전력을 공급하고, 양질의 철광은 스웨덴의 기간산업인 조선·자동차·차량·베어링 등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또 울창한 삼림은 제지·펄프·제재·가구 등의 산업발전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최근에는 화학약품, 첨단산업 분야에도 치중하여 수출을 증대시키고 있으며, 경제신장률이 호조를 보여 많은 기업이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


    다른 스칸디나비아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대체로 수공예가 우세하였으나, 19세기 말부터는 점차로 산업지구로부터 형식에 관한 아이디어를 흡수하기 시작하였던 탓에 스웨덴적인 현대양식이 나타나게 되었다.

  • 단순성과 인본주의에 바탕한, `보다 아름다운 제품을 생활에'
    1915년에 스웨덴의 장식미술은 하나의 전기를 맞게 된다. 그것은 <스웨덴 디자인협회>에서 제조업체와 접촉하기 위해 미술가와 공예인을 고용하는 단체를 발족시킨 일이다.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있어 이 조직은 독일공작연맹의 원칙들을 모델로 삼았다. 즉, 이들은 독일이 산업미술의 후원 아래 급속도로 성장하여 세계시장에서 그 위치를 확보한 점을 주목한 것이다.

    <스웨덴 디자인협회>는 스웨덴 뿐만 아니라 스칸디나비아 디자인 운동의 핵심적인 바탕이었다고 말해도 좋은 것이다. 이 협회의 목적은 실질적인 스칸디나비아 디자인 운동의 이념이 되었으며 나아가 모던디자인 운동의 방향까지 제시해 준다. 기본적으로 이 협회는 스웨덴의 공예와 무역의 진보를 고취한다는 실질적인 목적으로 출발하였으며 오늘날에도 이 목적에는 근본적으로 변함이 없다.

    스웨덴 디자인의 기본은 사회가 산업화함에 따라 생활을 위한 미가 민주화되어야 한다는 이념에 있다. `보다 아름다운 제품을 생활에'라는 스웨덴 특유의 슬로건을 실천함으로써 스웨덴의 디자인 나아가 스칸디나비아의 찬란한 디자인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슬로건의 실천이념은 곧 값싸고 훌륭한 품질의 실용제품을 일상생활에(better and cheaper utility goods for everyday)라는 것으로서, 1919년 그레고르 파울손(G.Paulsson) 교수에 의해서 더욱 고취되었던 것이다.

    스웨덴 디자인의 위상을 설정한 첫번째 지침서는 파울손이 5년 후에 쓴 <더욱 아름다운 일상용품. More Beautiful Everyday Things>이라는 책으로, 여기서 스웨덴의 디자인은 민주적인 감흥과 함께 충분히 표현되어 있어 스웨덴 사람들의 단순성과 더불어 인본주의 정신, 아름다움, 그리고 민주적인 이상까지도 혼합된 디자인 스타일을 추구하고 있다.

    1930년의 스톡홀름에서의 세계박람회는 스웨덴 디자인을 위해 매우 중요한 국제적인 장소가 되었다. 건축적인 견지에서는 기능주의가 주도했지만, 장식미술과 디자인에 있어서는 보다 명백하게 인본주의 미학이 우세하였다. 이때 불란서와 독일을 전형으로 삼았던 스웨덴의 건축과 스웨덴 전통을 중시하던 도자기, 유리, 가구 등의 제품디자인에서의 차이점은 현저했었다.

  • 스웨디쉬 모던
    스웨덴은 그들 나름의 20세기 디자인 운동과 스타일을 전개시킨 최초의 스칸디나비아 국가였다. 이는 앞에서 말한 스웨덴의 주요 디자인 기구인 <스웨덴 디자인협회>의 활동에 의해 촉진된 것이었는데, 이 기구는 설립이래로 미술가와 공예가들을 산업과 접촉하도록 해왔다.

    이러한 잇점을 살린 초기의 회사가 도자기 회사인 <구스타프스베르크. Gustavsberg>와 <로르스트란트. Rorstrand>, 그리고 유리회사인 <오레포스. Orrefors>였고,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걸쳐 이 회사들에 고용된 사람들은 1940년경 `스웨디쉬 모던(Swedish Modern)'이라고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의 개척자가 되었다. 이 스타일은 단순성과, 자연적 상상을 이용한 것이 특색이었으며, 파울손같은 사람이 설파한 민주주의적 이상을 구현한 것이었다. 이 기본원리들은 전후의 시대까지도 스웨덴의 디자인을 조명하는 것이었으며, 이 시기에 스웨덴 디자인이 누린 국제적 명성의 토대였다.

    1930년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전시회는 그 당시 많은 나라의 건축가들이 독일에서 전개되었던 투박한 기능주의 미학에 일시적으로 현혹되었기에 스웨디쉬 모던의 발전에 잠깐의 틈을 벌려놓았다. 그렇지만 30년대 중엽, 브루노 매트슨(B.Mathsson), 베르크(G.A.Berg)와 요제프 프랑크(J.Frank)같은 스웨덴 가구 디자이너들은 스웨덴 디자인에서 문양, 인간적 가치, 전통, 자연적 상상의 중요성을 다시 주장하고 나섰다. 목재와 피혁같은 자연재료에 대한 그들의 요지부동한 신념을 통해, 그리고 인간적 규모와 편의에 대한 그들의 감수성에서 이 디자이너들은 스웨디쉬 모던을 인정받는 스타일로 만들어낸 장본인이 되었다.

  • 1939년 뉴욕 세계 박람회장의 스웨덴전은 경직성에서 탈피한 유연한 곡선, 온건한 표현 등 단순간결한 현대적인 양식을 보여주었으며, 한 비평가로 하여금 이 국가의 디자인을 `건전성을 향한 운동(A Movement toward Sanity)'이라 묘사하게 했는데, 이로부터 기타 주요한 디자인 현장에서 이는 삽시간에 세기 중엽의 지배적인 가정 스타일로서 국제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 `스벤스크(Svensk)', `포름(Form)'처럼 스웨덴을 연상케 하는 이름을 가진 상점들이 메트로폴리탄 중심으로부터 전세계로 퍼져갔고, 스웨디쉬 스타일은 민주적이면서도 우아한 `굿 리빙(good living)'이라는 관념과 동일시되었으며, 전통, 인간적 가치, 미가 중요한 구실을 하는 세계를 상징하게 되었다.



  • 목가적인 국토와 평등의식
    역사의 한 시기에 북유럽을 주름잡던 바이킹의 후예인 덴마크인들은, 오늘날 낙농과 공업 디자인 등으로 부를 축적하여 풍요로운 생활을 구가하고 있다. 또한 이 나라의 평평한 지형은 주민의 정신에도 평등의식을 심어주어, 계급의 차이가 적은 평등·자유·복지의 사회를 이룩하게 만들었다.

    목가적인 국토의 여기저기에는 10세기 전후에 활약한 바이킹의 발자취와 11∼14세기의 그리스도 교회,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왕국의 유물들이 산재하여 이 나라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덴마크는 비교적 늦게 변화했지만, 비교적 빨리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가 되었다. 이런 변화의 과정에서 이전의 공예문화가 많은 나라보다 더 좋은 방향으로 새로운 디자인의 분야와 결합되었다.특히 덴마크 디자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커다란 효과는 1931년의 덴·페르마넨테(Den Permanente)(9)라는 디자인 상설 전시장이 디자이너 카이 보에센(K.Bojesen)에 의해 창설됨으로써 그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에 1930년대부터 덴마크 디자인은 현대화하기 시작했고 덴·페르마넨테로부터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다.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덴마크는 원자재가 부족한 농업 국가였기 때문에 영국, 독일과 같이 고도로 공업화한 나라들처럼 산업을 지원할 수 없었으며 따라서 수공예가 이러한 나라들보다 더 오래 존속할 수 있었기 때문에 수공예 바탕의 디자인을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 데니쉬 모던
    이웃과 스웨덴보다 국제시장에 조금 늦게 출현하긴 했지만, 1950년대에는 덴마크의 가정 스타일은 인기있고 쓸모있는 것이 되었다.

    덴마크의 도자기와 유리제품도 장인성과 미적 단순성의 통합과 강하게 결부되어 있는 금세기에 스스로 명성을 구축해왔지만, 현대 덴마크의 디자인이라는 맥락에서 가장 빈번하게 우리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바로 가구이다. 카아레 클린트(K.Klint)와 모겐스 코호(M.Koch), 그 다음 세대로 보르게 모겐센(B.Mogensen), 한스 베크너와 핀율(F.Juhl), 보다 최근에는 아르네 야콥센(A.Jacobsen), 폴 캐야홀름(P.Kjærholm)과 베르너 판톤(V.Panton)같은 이름은 모두 금세기 중엽을 지배한 덴마크 가구의 대중적 성공과 굳게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가운데 그들은 자연적 재료―특히 너도밤나무, 자작나무, 티크―에 대한 존중심과, 윈드졸(windsor), 딱딱한 등받이, 갑판의자, 사파리 의자같은 전통적인 의자형에 대한 관심을 보였는데, 이에 따른 그들의 가구는 모두 이 시기 대중시장의 가구에 영향을 미쳤다.

    덴마크의 전형적인 가구 디자이너는 숙달에 의한 캐비닛 제작자였는데, 그의 접근법은 공예적 세부에 대한 관심을 보임은 물론, 작은 주택에 맞는 가벼우면서도 안락한 가구들에서 표출되듯이 민주주의적 이상에 대한 존중심을 보였다. 이를테면 1942년부터 1950년까지 덴마크 협동조합에서 일을 했던 모겐센이 만들어낸 테이블, 의자, 소파, 책장 등은 전통적인 의자형태들을 상기시키는 말쑥하고 융통성있는 것들이었다.



  • 호수의 땅, 시적인 나라
    북유럽 5개국 중에서 아이슬란드와 함께 공화국인 핀란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뿌리부분에 자리하고 있는 삼림과 호수의 나라이다. 핀란드의 정식 명칭도 늪과 호수의 땅이라는 뜻의 `수오미 공화국(Suomen Tasavalta)'이다. 빙하시대에 만들어진 수많은 호수와 침엽수의 삼림이 끝없이 이어지는 시적인 나라가 핀란드이다.

    19세기 중엽까지는 농업국이었으나 독립 이후에는 목재와 펄프 공업이 발달하였다. 전후에는 공업화를 서둘러 금속·기계·섬유 등 공업이 발달하였다. 산업에서 공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 26%나 되며, 역시 목재 관련 공업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 다음이 기계와 조선이며, 서비스 산업도 50%를 넘어서면서 선진국형으로 변모되고 있다. 유리와 도자기·가구 등의 디자인에서는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며, 주요 수출품으로서 비중이 크다.

  • 북구의 다른나라에 비해 비교적 늦게 시작
    핀란드는 스웨덴과 덴마크보다 늦게 독자적인 디자인 철학을 지닌 통일된 국가로서 등장했다. 핀란드의 현상은 1951년과 1954년의 <밀라노 트리엔날레>에서야 비로소 눈에 띄게 되었는데, 그것은 주로 <이탈라. Iittala>가 거기에 출품한 야단스러울 정도로 표현적인 유리 디자인이 이루어낸 결과였다.

    1947년 <이탈라>가 조직한 공모전에서 타피오 비르칼라(T.Wirkkala)와 티모 사르파네바라는 디자이너가 수상했다. 이들은 모두 유리에 관한 사전경험이 없었음에도 재료에 대한 표현적·조각적 접근법을 급속히 발전시켰고, 이로써 1950년대에 국제적인 명성을 획득했다. 이 두 사람의 디자인은 당시의 전형적인 핀란드적 테마였던 험준한 바위 형태를 상기시키는데, 이것들은 특히 부유한 국제시장에 어필하는 높은 선호의 대상이 되었다.

    도자기 회사 <아라비아. Arabia>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절에 디자인에 대한 보다 민주주의적인 접근법을 발전시켰다. 이 회사의 디자인 정책을 창조하는 책임자는 회사의 미술담당자 케이 프랑크(K.Franck)였다. 50년대 중엽 프랑크는 단순한 주방용품들을 디자인했는데, 이것이 차후의 현대적 핀란드 디자인의 고전이 되었다. 예컨대 그의 `킬타(Kilta)' 서비스는 오늘날까지 거듭 채택되고 있고, 처음 출현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

  • 1950년대 핀란드의 디자인 스타일은 여타의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서 보이는 것보다 더 과감하고 모험적이었을 뿐 아니라, 직물과 가구에서는 가장 현저하여 핀란드 디자이너들끼리 서로 우위를 다투었다. 특히 핀란드 직물은 실크스크린 인쇄가 된 강한 패턴과 색채를 사용한 점에서 두드러졌고, 단색의 바탕위에 과감한 추상적 모티브를 구사한 것이 특색이었으며, 1951년에 설립된 <마리메코. Marimmekko>가 생산한 작품은 이 분야에서 모범이 되었다. 공장에서 나온 밝은 색채의 면직물은 대체로 실내장식품을 위한 것이었으나, 이 회사의 설립자 아르미 라티아(A.Ratia)는 `팝'에서 따온 일단의 줄무늬진 면직물을 개발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문양을 충분히 살려낸 단순한 의상 디자인으로 마름질되었다.

    전후 시기의 핀란드 디자인 현상은 이웃한 나라들을 지배하던 전통공예의 원리에 한결 덜 구애받는 것이었고, 오히려 현대의 세계로부터 받은 자극들에 의거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와 함께 핀란드의 위대한 선구자 알바 알토가 20∼30년대에 디자인한 합판가구는 전후 시대의 생산에서 현대 디자인의 `고전적' 가구로 남게 되었다.


    우리는 보통 1950년대에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세계의 모던디자인계에 지배적인 공헌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핀란드는 이 분야에 늦게 뛰어들었기 때문에 공예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새로운 팝 스타일의 도래를 대환영하였다. 이것은 직물과 가구분야에서 특히 두드러지는데, 이 분야에서 밝은 색의 줄무늬와 광택을 잘 낸 플라스틱 제품들은 1960년대 핀란드의 디자인에 아주 신선한 인상을 주었다. <마리메코>와 <뷰오코. Vuokko>의 직물과 <아스코. Asko>의 가구제품이 이에 기여하였다.

  • 핀란드가 공예전통이 부족한 것은 그 디자이너들이 대체로 한 가지의 매체를 통한 작품활동에 국한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1960년대에 아주 드센 핀란드 산업 디자인 운동을 발생케 하였는데, 이때 그 전대의 영웅 타피오 비르칼라와 티모 사르파네바가 유리에만 전념하였던 것을 버리고 스튜 남비같은 간단한 가정제품의 영역을 개발하였다. 이 제품들은 모두가 기능적 목적과 조각적인 곡선을 결합시킨, 그 당시의 우아하고 의미있는 핀란드의 미학을 한껏 표현하고 있었다. 여기에 또 한사람 앤티 누르메스니미가 가담하였는데, 그는 60년대와 70년대의 가장 유명한 핀란드의 디자이너가 되었고, 수많은 전시회와 회의를 통해 외국에서 나라를 대표하였다. 그는 그의 동료들이 그랬던 것처럼 `핀란드인의 재주'를 나타내는 다른 분야의 특징과 꼭같은 성격을 띤 주방용품의 디자인에서 뛰어났다. 직물과 가구에서처럼 그의 작품들은 종종 밝은 색상을 띠고 있었으며, 좋은 질과 새로운 재료, 현대적 형태를 결합시킨 새로운 현대미학을 제시하였다.



    3. 현상황

  • 사용자와 일체가 되는 도구
    북구디자인을 대표하는 덴마크 디자인에 대해, `대부분의 덴마크 디자인의 즐거움을 주는 기하학은 기능의 요구에서 나온다'라고 의 일원인 스테펜 굴만(S.Gulmann)은 말한다. `아름다운 도구는 그것이 최적의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또한 `덴마크 디자이너는 그들의 제품을 좋은 도구, 사용자와 일체가 될 수 있는 도구로 만들려고 노력한다'라고 의 책임자인 엔 베른센(J.Bernsen)은 말하며 `목표는 사용자가 도구를 신경쓰지 않고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제품을 좋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한다.

    `도구'는 덴마크 디자인에서 덴마크적인 것(Danishness)에 대한 논의에서 종종 제기되는 단어이다. 심지어는 `도구'라는 덴마크 디자인 잡지도 있다. 도구에 대한 논의에 내재된 단순한 기능성의 원리는, 덴마크 디자인의 경우, 탁상공론에서 벗어나, 그래픽에서 제품, 가구, 건축에 이르기까지 적용된다. 이것은 유럽에서 아마도 가장 강한 국가적 아이덴티티를 구성하는 요소의 하나일 것이다.

  • 오랜 시간의 연속성
    덴마크가 작은 영토와 이제 막 5백만의 온순한 국민이 사는 나라라는 사실이 이런 모습의 통일성을 뒷받침한다. 덴마크 국민은 인종학적으로 유럽의 다른 나라의 국민보다도 훨씬 동질적이며, 매우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는다. 또한 의심할 수 없는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덴마크 사람들은 그들의 아이덴티티에 대해 편안하게 생각한다. 이러한 점은, 디자인에서 전 범위의 제품에 걸친 통일성 뿐만 아니라 수년간의 연속성이 그들의 아이덴티티를 나타내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의자나 커피포트가 1950년대 것인지 아니면 1990년대 것인지를 말하는 것이 종종 어려우며, 어떤 경우에든지 덴마크 사람들은 단지 새롭다는 기준에서 이전 것보다 나중 것을 더 좋아하지 않는다. `덴마크는 유명한 디자인 고전작품이 보통의 덴마크 사람에게도 인기있는, 그런 몇 안되는 나라 중의 하나이다'라고 베른센은 말한다. `여러분이 전세계의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많은 덴마크 디자인을 수십만의 덴마크 가정에서도 또한 볼 수 있다'

  • 과도한 것과 자랑을 금하는 생활

  • 덴마크 사람들에게, 사람이 만든 물건은 단순하고, 자연스럽고, 분명해야 한다고 당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덴마크의 <얀트 법칙. Jante law : 관습적인 좋은 충고>은 과도한 것과 자랑하는 것을 금한다. 그래서 거대하고 무절제한 제품은 반대한다'라고 산업디자이너 앤더슨 스미스(A.Smith)는 설명한다. 이런 원리는 물건 자체뿐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에도 적용된다. 덴마크 사람들은 다음 유행이 무엇일지 바라보기 위해 기다리는 것에 별 관심이 없다. 그들은 박물관의 고전 작품이 될 수 있는 작품을 매우 주의깊게 지켜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제품들은 제기능을 잘 발휘한다. 어떤 경우 그런 제품의 판매는 계속 성장한다.


  • 자연에 대한 관심과 보존
    핀란드는 북구중 대표적인 문화의 나라로서, 앞에서도 말했듯이 삼림자원이 풍부한 반면 농지는 부족하고 수많은 호수(셀 수 있는 숫자가 약 6만개라고 한다)와 섬들로 이뤄져 있으며, 북극에 가까우므로 태양이 부족한 자연환경 속에 인구밀도가 낮은 나라이다. 따라서 이들의 최대의 관심사는 자연과 그속에서 사는 인간에 관한 것이다. 즉 자연이 베푼 푸른 숲과 크고 작은 호수가에서 햇빛을 즐기며 백야 속에서 여유있게 살면서 삶의 질을 추구하면서 그것을 즐기는 자세이므로, 자연환경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아울러 자연이 베푼 혜택을 어떻게 하면 잘 보존하면서 그속에서 인간의 삶을 조화시키려는 지혜를 모으고 있는 것이다(핀란드의 중·고교 학생에게 가장 중요한 단어는 환경, 자연보호, recycle이라고 한다).

    이러한 점이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마침 연구자가 방문했을 때가 하지였는데, 일년중 내내 부족하였던 일광을 즐기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밖으로 벗고 나와 햇빛 속에서 독서와 산보를 즐기고 있었으며, 하지 축제(Mid-summer Festival) 기간의 휴일을 즐기기 위해 헬싱키의 모든 시민들이 시내를 떠나 전원지의 주말주택으로 떠나 자연속에서 휴식을 취하려 분주하였다.

    이렇듯이 주어진 자연환경을 아끼면서 그속에서 일상생활을 즐기며 소박하게 사는 이들의 생활태도와 민족성은 디자인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이들의 디자인은 일상생활 중에서 필요한 가구류, 식기류, 조명 기구류, 등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그 디자인 역시 자연적인 소재를 그대로 살린(예를 들어 목재, 도자, 유리, 섬유 등) 단순미와 자연미가 넘치는 것들로서, 전통적인 소재와 형태를 귀하게 간직하며 지속적으로 계발해 나가면서 담백하고 자연적인 디자인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또한 과거의 전통적인 공예가 일상용품 디자인에 자연스럽게 접목되어 생활도구와 일상적인 삶이 조화롭게 연계되어 있다.

  • 일상생활과 연계된 디자인
    따라서 디자인이라는 직종이 특수한 분야가 아니고 일상생활과 가장 자연스럽게 연계된 분야로 되어 있어 일반인들도 디자인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커서 어느 가정집에나 핀란드의 세계적인 작가 알토의 가구나 화병을 갖고 있으며, 이것이 사치품이나 기호품이 아니라 일상생활 용품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디자인의 각분야, 예컨데 제품, 패션, 텍스타일, 실내 등이 일상생활을 위주로 상호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어, 이들 분야의 총연합체인 를 중심으로 그들의 작품을 항상 디자인 센터인 에서 년중 전시·판매하여 일반인들의 실생활에 깊숙히 파고들어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들 작품이 쉽게 생산업체와 연계되어 백화점 <스토크만. Stokmann-Orno>, 가구회사 <아르텍. Artek>, 생활용품회사 <아라비아 하크만. Arabia Hackmann>, 유리제품회사 <이탈라>, 섬유회사 <마리메코> 등에서 작품과 같이 아름다운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 디자인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
    아울러 기업체와 정부에서도 일상생활에 깊숙히 침투해 있는 디자인 및 공예미술에 항상 관심을 기울여 핀란드의 대기업, 예를 들어 금속공구류 제조회사인 같은 경우는, 공예가, 미술가, 디자이너에게 기업소유의 일정지역의 옛날 마을을 무상으로 대여하고 그곳에서 각종류의 작가들이 함께 생활하면서 활발한 작품 활동과 전시를 할 수 있게 하며 일종의 관광자원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정부 역시 디자인에 대한 관심과 정책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어, 북구의 디자인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다(예를 들어 세계 산업디자이너 협의회인 의 사무실이 사무실과 같은 건물에 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특히 헬싱키의 유일한 미술과 디자인 대학(UIAH)의 학장 솟따마(Y.Sotamaa)는 세계적인 미래의 디자인 방향을, 전통과 자연에 바탕을 둔 북구의 디자인의 특성에서 찾아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어, 이 학교의 특성과도 잘 일치하고 있었으며, 학교, 진흥기관, 정부 그리고 기업과의 일관된 연계성을 바탕으로 하여 적극적인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스칸디나비아가 스타일의 관점에서 주된 영향력을 구사할 수 있는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아마도 이들 스타일의 큰 공헌은 전통적 공예들이 필연적으로 노스탈쟈를 불러 일으키지 않고 현대적인 맛으로 재해석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어준 예일 것이다. 스칸디나비아는 또한 생산업자에게―사기업이든 공공기관이든― 예술가를 많이 고용하도록 독려하였다.

    스웨덴에서는 강력한 사회적 윤리강령으로 아름다운 물건들은 민주적으로(대중에게) 유효해야 한다고 요구되고 있다. 유사하게, 덴마크의 가구산업은 상대적으로 작지만 풍부한 국제시장을 연계시킴으로서 최고의 공예수준을 유지토록 하고 있다.

    점차 거대해지는 현대의 국제시장을 생각할때 이같은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의 성취는 보잘 것 없는 것같이 보일지 모르나 1939년에 뉴욕 세계 박람회에서 일찌기 보인 그들의 인본주의적 메세지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남아있다.

  • 원문 : http://chonhyang.com/html/korea/2/2.3.5.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