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구의 양식 형성과 발달

가구의 양식은 자연 환경과 인문적 환경인 의식주 생활 양식과 사회제도, 외래 문화의 영향 등이 상호 작용하면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 발전되기도 하며 또 새로운 양식이 형성되고 지속적으로 사용되어온 양식이 소멸되기도 한다.

조선시대의 가구 또는 그와 유사한 양식의 가구들이 현재까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소중하게 다루어지고 아낌을 받고 있다. 그러한 이유는 그 가구들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의 생활 감정, 풍토 등에 순응하여 우리의 감각에 맞고 쓰기에 편리한 양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구의 대부분은 조선시대 후기의 것이며, 고려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서 가구다운 유물의 전승 예는 거의 찾아볼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전통 목가구들이 과연 언제부터 사용되어 왔고 어떻게 변화, 발전되어 왔으며 외래 요소는 어떠한 것인지 규명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더욱이 조선시대에는 숭문천기(崇文賤技) 사상으로 장인들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으며 가업을 세습하려는 장인도 없었고 가구의 작업 공정이나 전해 오는 도면 등도 아직까지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일부 선비들이 사랑방에서 자신들이 사용했던 문방 가구를 소재로 하여 쓴 詩 또는 부(賦)에서 가구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안방 가구에 관해서는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 거의 없다. 그것은 비록 여성들도 글을 배우기는 했지만 글을 지어 남에게 읽혀지는 것은 금기 사항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유교 사상에 입각하여 남녀의 생활 공간을 구분해 왔기 때문에 가구 양식이 같지 않았다. 따라서 전통 가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안방(안채)과 사랑방(사랑채)의 형성 배경과 치장에 대해 파악하여야 한다.

안방과 사랑방의 형성 배경

삼국시대 이래로 우리나라의 정치 사상을 지배해온 것은 유교였다. 유학은 삼국시대에 도입되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에 태학을 세웠으며, 백제는 확실하게 알수는 없으나 고이왕 52년(285)에 왕인 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일본에 전한 것으로 미루어 그 이전임을 짐작할수 있다. 신라는 삼국 가운데 가장 늦은 신문왕 2년(682)에 국학을 건립하였다. 당시의 유학은 유능한 관리를 양성하고 지도 계급으로 하여금 경사에 통하게 하며 사부와 문장을 능하게 하는데에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삼경의 하나이며 유자의 고례에 관한 설을 수록한 <예기>'내칙(內則)'에 있는 "예는 부부의 구별을 삼가는데서 시작된다. 궁실의 밖과 안을 구별하여 남자는 외실에 있고 여자는 내실에 있어 서로 궁을 깊이 하고 문을 굳게 하는데.... 남자는 그 필요한 때가 아니면 여자의 방에 들어가지 않고 여자는 그 예의상 필요치 아니하면 자기의 방을 나오지 않는다." 같은 내칙에 나오는 " 일곱살이 되면 남녀가 자리를 같이하여 앉지 않으며 음식을 함께 먹지 않는다." 또 " 남자가 열 살이 되면 나아가 스승을 취하여 외실에서 침식을 하면서 육서(六書: 한자의 구성 및 황용에 관한 여섯 종목인 상형, 지사, 회의, 형성, 전주, 가차)와 계수를 배운다....행하는 예절은 처음 배운 대로 행하며 아침 저녁으로 유자의 예의를 배우고 스승에 청하여 서편의 수와 언어의 신실을 배운다. 열한살 열두 살의 경우도 모두 같다." 라고 기록된 것처럼 철저한 남녀 유별의 이행은 고려시대 때 어느 정도 행해졌으나 모든 계층에 걸쳐 실시 되지는 않았던것 같다. 그러나 관리와 같은 지배 계층의 가옥에는 내실과 외실이 구분되어 있었다. 그것은 <용재총화> 제7권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기록으로 알수 있다.

「고려시대의 과거에는 시관이 단지 지공거와 동지공거 2인이 있어 응시자들이 명망 있는 문신을 은문으로 삼았다. 은문은 문생 보기를 자제와 같이 하였고 문생도 은문 보기를 보모와 같이 하여 데릴사위는 내실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도 문생은 특별히 내실에서 서로 보기를 허락하였다.」 이와 같은 고려시대의 주택은 내외의 구별이 뚜렷하였고 고려 말에는 이러한 공간을 사랑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 시대는 조선시대만큼 남녀 유별의 내외법이 심하지는 않았다.

조선시대는 유교가 절정을 이룬 시기였다. 지배층의 관심은 중국의 과거시험 제도를 철저히 채택하여 유교적 개념과 그것을 수록한 경전에 집중시켜 명성과 성공의 길을 유교적 학술과 사상의 습득으로 좌우되도록 하는데 있었다. 충과 효, 부인의 정조를 엄격히 강요하였으며 앞서 말한 <예기>에 있는 것과 같이 남녀 유별의 내외 사상이 사회를 지배하여 그 영향이 곳곳에 미쳤다.

남자 아이들은 태어난뒤 일고여덟 살까지는 출입하고 행보하는일, 기거와 언소, 의복과 음식에 관한 예절, 조심하고 화목하는일, 덕성을 배양하는일 등을 어머니로부터 배운 다음 사랑에 거처하며 글을 배우고 서당에도 다녔다.

반짇그릇 40x40.5cm. 높이 11cm.

반짇그릇은 버들, 대, 종이 등으로 만든 것이 많으며 나무로 된것은 귀한 편이다.

나무로 된것은 한 면에 방형의 뚜껑 달린 칸을 설치하는 것이 통례이다.

반면 여자 아이는 어머니로부터 명령에 순종하며 청소하는일, 길쌈과 바느질 및 음식 만드는 일을 배웠으며, 아버지로부터는 <경서>와 <사서> <소학> <여사서>등을 읽을수 있을 정도의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여러 집안의 성씨, 조상의 계보, 역대의 나라이름, 성현의 이름자 등을 알수 있을 정도에서 그쳤으며 시사를 지어 외간에서 읽혀지는 것을 금하였다.

조선 전기 이전에는 부무(傅女+母:여자스승)의 교육이 있었으며 부인으로서 문장에 능하고 글씨에 뛰어난 사람들이 적지 않았으나 세종때 한글을 반포한 이후에는 부인들이 글씨를 배우지 않아 시에 능한 사람은 있었으나 글씨로 이름난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고 한다. 일부 진보적인 가정에서 많은 교육을 받은 여자가 이를 드러내 표현하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서경>목서) 또는 " 부인이 말이 많은 것은 화란의 계제이다."(<시경>대아, 첨앙)라는 말로써 규제하였다.

여자의 성정과 행실은 온유, 정숙, 근면, 검소해야 하였고, 가정의 화목은 여성의 의무였다. 고성, 다변, 과장된 말, 짙은 화장 등은 현숙한 부인의 도리가 아니었다. 시부모에 대한 봉양, 제사의 거행, 손님 접대시의 정결한 음식 솜씨 및 길쌈과 바느질 솜씨는 여성이 갖추어야 할 기본 자세였다. 여성이 거처하는 곳에 서적과 지필묵연을 비롯한 문방구를 갖추어 두고 글을 배우기도 했는데 여성의 본분이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집안에서 의식주의 살림을 총괄하는 일이므로 그 방을 문방이라 하지않고 내실, 내방 또는 규방이라 하였따. 그러므로 규방에서의 필수품은 규방칠우라 부르는 바늘, 실, 자, 인두, 골무, 가위, 다리미였다. 이러한 사회적 관습으로 학문과 모든 사회 활동이 남성 위주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사랑방은 남성의 전용공간이자 문방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안방의 치장

3층장

104.2x51.3cm. 높이 165.2cm.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알갱이가 용목인 이런 양식의 장은 1800년대에 많이 제작되었다.

용목은 나무의 혹을 켜서 그 무늬가 독특하다.

우리나라 주택의 공간은 여성이 거처하는 안방과 남성의 거실인 사랑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주부가 노모와 출가하기전의 딸 그리고 어린 자녀와 함께 기거하면서 가족의 음식 장만과 의복 수발 등 살림을 총괄하던 가정의 중추부로서 직계 가족이외의 남성 출입이 금지된 폐쇄된 공간이다. 안방은 안주인의 거처로서 안주인의 실내 생활 대부분이 이곳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신분에 걸맞게 꾸며져 서민 주택과 상류 주택에 따라 규모와 시설에 차이가 있다.

서민주택의 경우 부엌과 붙은 안방 바닥은 흙바닥에 삿자리를 깔거나 장판지 마감을 하였다. 벽과 천장에는 백지를 발랐지만 천장의 서까래가 그대로 노출 되는 경우도 있다. 아랫목에는 차렵이불을 깔고 한쪽 벽면에 횃대를 매어 옷을 걸어 두도록 하였다. 윗목 또는 옆벽에는 머릿장이나 반닫이를 놓았다. 그리고 그 옆에 2층 또는 3층장과 의걸이장 등을 나란히 붙여 놓고 머릿장이나 반닫이 위에는 개킨 이불을 장위에는 함을 올려놓았다. 건넌방은 노모 또는 자녀가 썼으며 이곳에는 반닫이와 머릿장 또는 이불장을 두었다.

상류 주택의 경우에는 안방과 붙어서 윗방이 있는 경우가 많다. 방바닥은 온돌에 장판지로 마감하고 벼견에는 전주산 간장지, 남원산 선자지, 영변산 백로지, 평강산 설화죽청지 등 흰색의 고급 종이로 도배를 하였으며 최상의 도배는 백능화지로 하는 것이었다.

천장은 청색, 녹색, 아청색 등의 능화지로 바르고 반자틀에는 청지도는 유지를 발라 벽과 천장의 경계를 구분지어 산뜻한 느낌을 주도록 하였다.

아랫목과 측면의 방문에 걸쳐 곽분양(당나라때 명장, 모든복을 갖추어 팔자 좋은 일생을 마쳤음)의 행락도나 백자천손도(百子天孫圖), 요지연도(搖池宴圖:중국 곤륜산에 있는 연못으로 주나라 목왕과 서왕모가 이곳에서 만나 잔치하는 그림)와 같은 병풍을 둘렀으며 아랫목에는 보료를 깔고 안석을 두었다.

40x24.5cm. 높이 24cm.

함은 귀중품을 보관하는 상자의 일종으로 내실용은 대부분 칠을 하거나 자개로 만든다.

벽에는 빗접 고비를 걸고 또 경대, 문갑, 사방탁자 등을 갖추어 놓았으며 윗방에는 장과 농을 배치하였다. 장 위에는 함 또는 작은 궤를 올려 놓았으며 장 밑에는 세숫대야, 요강 등을 두었다.

건넌방은 집의 규모에 맞게 윗목에 2층 또는 3층장과 반닫이 등을 구비하였다. 장이나 농의 다리는 앙가발로 되었고 가구의 금속 장식은 놋쇠와 백통으로 된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서민 주택의 경우 안방 옆에 붙은 대청에는 찬장과 뒤주를 두고 벽면에 시렁을 매어 소반을 얹고 보 사이에 맨 시렁에는 제상을 올려놓았다. 뒤주 위에 뒤쪽 천판에는 용준(龍樽: 용을 그린 항아리)과 장아찌, 젓갈, 꿀 등의 밑반찬과 기호 식품을 담은 크고 작은 백자 항아리를 두세층으로 포개 놓았다.

규모가 큰 주택의 대청에는 아무런 가구를 비치하지 않았으며 집안의 행사는 이곳에서 치렀다.

사랑방의 치장

서안

59x29.5cm. 높이 23.7cm. 국립중앙 박물관 소장

판재를 이용한 단순한 형태이지만 다리를 겸한 양측 널에 여의두문을 투각하여 장식 효과를 나타내었다.

남성의 거주 및 활동 공간은 외실이라고 표현되는 사랑에서 이루어졌다. 이곳은 남성들의 침실이며 거실이자 서재였으며 응접실의 역할도 하였다.

규모가 작은 서민 주택에서는 외부에 면한 온돌방 한 칸을 사랑으로 정하여 거기에 서재를 꾸몄다. 그러나 안채와는 별동으로 지은 사랑채를 갖추는 것이 일반적이다.

규모가 큰 사대부의 가옥에는 방과 마루가 반복으로 구성되어 있는 안사랑과 바깥사랑을 두었으며 바깥사랑의 울타리 안 또는 담장 밖에 재사(齋舍)라 부르는 별동의 서고 겸 서재를 두기도 하였다.

문갑(단문갑)
113x35.2cm. 높이 42.5cm. 국립중앙 박물관 소장
문갑은 각종 문방 용품을 보관하는 가구로서 하나로된 단문갑과 쌍으로 쓰이는 쌍문갑의 두가지가 있다.
단문갑은 쌍문갑에 비해 길이, 높이, 폭 등이 큰 편이다.

집 안에 동산이 있는 저택에는 전망 좋은 산정사랑을 배치하기도 하였다. 안사랑은 은퇴한 노부부의 거실로 쓰이며 안채와 연결되도록 건축되는 것이 통례이다. 산정사랑은 가장이 은밀한 연회를 위해 이용하던 곳으로 이곳과 안사랑에는 서재를 꾸미지 않았다. 바깥사랑은 가부장의 처소로서 침실, 방(사랑), 청(마루), 누마루로 구성되고 이때 방과 누마루가 서재로 꾸며지며 이를 문방이라고 부른다. 성장한 아들을 위해서 바깥사랑에 온돌방을 하나 더 마련하기도 했는데 이때 가장의 사랑방을 큰사랑이라 하고 성장한 아들의 사랑방을 작은 사랑이라 구분하여 문방으로 삼기도 하였다.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 초기의 선비, 사대부들은 이 문방을 필수적으로 갖추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 아래서 17세기 이후 중국의 송, 명대에 편찬된 문방청완에 관한 여러 서적들이 조선시대의 선비, 사대부들에게 널리 알려져 사랑방 가구 양식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영, 정조 때에는 주택 양식이 세련되어지고 문예 부흥의 기운에 따라 일반에까지 널리 유행된 듯하다. 정조 3년(1783) 11월 27일의 <내각일력>에 11월 초하룻날에 실시한 화원의 취재에 화제로서 문방이 포함되어 있따. 이 시기에 편찬된 <경도잡지> <임원경제지>등에도 문방이라는 항목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지배층의 문방에 대한 관심도와 일방인의 문방에 대한 취향을 짐작할수 있다.

문방의 치장은 방의 주인인 선비, 사대부들의 취향에 맞게 꾸며졌다. 조선시대 선비, 사대부 사회에서의 풍조는 그들이 사회 지배층으로서 비록 부유하기는 했으나 부귀를 나타내는 화미함을 속된 것으로 보았고 우아하면서도 청기한 멋을 사랑하였다. 따라서 선비, 사대부들은 유교의 윤리관에 합당한 청빈, 검소한 사랑방을 꾸미기 위해 자연목을 이용한 가구를 선호하였으며 이러한 풍조는 일반인에게도 유행하였다.

각게수리

69.5x43.5cm. 높이 64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문목의 여닫이문에 제비추리 경첩을 여러 개 달아 견고한 느낌을 준다.

사랑방에 비치된 가구류에는 서안, 문갑, 사방탁자, 책장, 궤, 각게수리, 연상(연갑), 안상(협식)등이 있으며 벽면에는 두루마리나 서한지를 꽂아 두기 위한 고비를 걸었다.

지체 높은 양반가의 사랑채에는 큰사랑, 작은사랑, 누마루, 침실, 서재, 대청 등이 있어서 평상, 의자 등의 가구를 더 비치하였으며 의걸이장을 두기도 하였다. 대체로 실내의 복잡한 배치를 피하기 위해 방 옆에 작은 측실을 만들어 그곳에 가구를 두기도 하였으며 궤나 함 등은 벽장이나 다락에 두었다.

책장

61x32.5cm. 높이 93.5cm.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3층의 소형 책장으로 단단한 짜임새는 귀중본을 넣었던 책장임을 짐작케 한다.

문방의 분위기에 맞는 치장을 하기 위해 실내의 벽면은 백지로, 천장은 청, 녹, 아청의 담담한 단색지로 도배하고 방바닥은 기름 먹인 각장 장판에 콩댐을 하여 청결을 유지하였다.

서화의 장식은 양 벽면에 걸거나 좌우대열함을 속되다 하였고 병풍도 보기에 좋지 않다 하여 기피하였기 때문에 문방 옆의 침방머리에 둘러치는 것이 상례였다.

연상

32x15cm. 높이 18.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무늬목을 이용한 이러한 형태는 조선시대 후기 연상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청빈, 검소함을 생활 이념으로삼은 곧고 맑은 정신은 방에 갖추는 문방 사우나 문방 가구에도 나타나 복잡한 장식이나 과다한 배열은 하지 않았다. 주인의 자리인 아랫목에는 보료를 깔고 그 앞에는 경상이나 서안과 함께 연상을 두었다. 주인의 좌우 벽면에 문갑을 붙여 놓고 그 위에 필통, 지통, 연적 등을 놓았다. 사방탁자나 책장 등의 가구들도 벽면에 붙여 놓아 좁은 방을 넓게 쓸수 있도록 하였으며 붓걸이와 고비는 벽에 걸었다. 이밖에 무쇠촛대나 목제 등경과 같은 등촉구, 수로, 향을 피우기 위한 향상, 끽연구 등을 구비하였다. 또 주인의 취향에 따라 수석과 난 등 완상품과 거문고, 퉁소 등의 취미 오락 기구를 갖추기도 하였다.

사랑 대청의 양 측면에는 자기나 골동을 놓은 삼각탁자나 사방탁자가 있으며 중앙에는 측탁을 곁들인 화류의자와 탁자 등을 놓아 이곳에서 예를 갖추어야 될 손님을 맞았다.

  1. jck241 2017.11.26 18:55 신고

    좋은 자료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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